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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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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국왕 대관식에서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여왕 대관식의 전통을 따라 머리를 풀었다. 당시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상징했다.[1] 그림의 제작 일자는 17세기 초반이며, 이 그림은 소실된 원본에 바탕을 두고 모방해서 그린 것이다.[2]
국왕 대관식에서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여왕 대관식의 전통을 따라 머리를 풀었다. 당시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상징했다. 그림의 제작 일자는 17세기 초반이며, 이 그림은 소실된 원본에 바탕을 두고 모방해서 그린 것이다.
Coat of Arms of England (1558-1603).svg
잉글랜드의 군주
잉글랜드 여왕

아일랜드 여왕
재위 1558년 11월 7일 ~ 1603년 3월 24일
대관식 1559년 1월 15일
전임 메리 1세
후임 제임스 1세
이름
별호 처녀 여왕 (Virgin Queen)
신상정보
출생일 1533년 9월 7일
사망일 1603년 3월 24일 (69세)
가문 튜더
부친 헨리 8세
모친 앤 불린
종교 성공회
묘소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서명

엘리자베스 1세(영어: 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는 1558년 11월 17일부터 1603년 3월 24일까지 44년간 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영어: Elizabeth Tudor)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 없던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를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으로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녀는 늘 “짐(朕)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게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위 이전 삶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자녀이다. 어머니 앤 불린은 왕자를 낳지 못했고, 엘리자베스가 태어난 지 3년도 안되어 사형을 당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헨리 8세와 그의 제1계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그녀는 생존 자체가 위험했다. 앤 불린은 3주 만에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남아 공주의 칭호가 박탈되었고 왕위 계승에서도 제외되었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참수형을 당한 뒤 엘리자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왕위 계승권이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이복 언니 메리 공주는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를 내쫓게 하였다는 이유로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튜더, 1546년 경, 익명의 예술가가 그림. 이 초상화의 꾸밈없는 모습은 이후에 등장하는 화려한 초상과 대비되는 것이다.

토마스 시모어

헨리 8세는 1547년 엘리자베스가 열 세살 때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이복 동생인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헨리의 마지막 부인인 캐서린 파는 곧 토마스 시모어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일부 역사가는 엘리자베스가 그 곳에서 경험한 감정적인 위기가 나머지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는다. 당시 시모어는 나이가 40세에 가까웠지만 "매력적인 남성"이었고, 열 네살이었던 엘리자베스와 소란스럽게 희롱에 가까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결국 캐서린 파가 두 사람이 서로 포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캐서린은 그 일로 토마스와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1548년 5월에 엘리자베스는 그 집에서 쫓겨났다.

메리 1세

이복 남동생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이 된 이복 언니인 메리 1세의 재위기간 동안 성공회에 대한 탄압을 피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로 위장하였으며, 때로는 죄수로 몰려 런던 탑에 갇히기도 하였고 숱하게 고문과 감시를 당했으며 살해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밝고 활기찬 성격을 가졌던 엘리자베스는 결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좌절하거나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를 본받아 외국어에 밝고 운동을 잘하는 재주꾼이었다고 한다.

재위 기간

1558년 11월 17일메리 1세가 병으로 죽자, 그의 유일한 후계자 엘리자베스가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25살의 나이로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며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추밀원과 균형적 관계를 유지했다. 엘리자베스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모욕하면서도 그들의 정치적, 군사적 경험들을 충분히 흡수했다. 전제적이지만 신중한 군주와 충성스럽지만 의심해보고 또 결정을 재촉하는 추밀원 사이에 균형이 계발된 것이다. 이것은 거의 집단적인 리더십에 가까웠다.(추밀원 추가바람)

중용(Via Media)정책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은 종교분쟁을 지혜롭게 해소했다는 사실이다. 메리 1세로마 가톨릭 복고 정책 그리고 성공회개신교에 대한 탄압으로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 등의 성공회 주교들을 포함한 약 300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화형으로 순교당한 공포 정치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성공회 신자인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를 환호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는 성공회였지만,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독실한 성공회 신자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고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종교분쟁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종교적 극단성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1559년 헨리 8세의 반(反)교황법령을 되살린 《왕위지상권》(흔히 수장령이라고 부르는데, 왕위지상권이라고 하는 게 맞다.)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잉글랜드 성공회를 다시금 잉글랜드국교로 확립하여 자신을 잉글랜드 성공회의 상징적인 수장으로 선언하였다. 물론 왕위지상권은 근대에 이르러, 잉글랜드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으며,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에 속한 성공회 교회들은 영국 왕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관구교회)들이기 때문에, 성공회를 영국국왕이 수장인 교회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회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노선을 걸음으로써, 종교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바로잡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중용정책은 성공회가 개혁하는 보편적 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로 설명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경제정책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대내적으로는 추밀원을 중심으로 유능한 정치가들을 등용했으며 정치성실청을 통해, 종교특설고등법원을 통해 통제하였다.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장려하였기 때문에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히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지만 을 키우기 위해 목초지를 확대한 인클로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전국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치안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의 방황은 심각해서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구빈법 또는 튜더구빈법으로 불리는 사회복지정책을 제정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 근로의욕을 꺾을 수 있는 구걸과 개인적인 자선행위를 금지한다.
  • 구빈세를 제정하여 사회복지비용 마련
  •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은 공공사업을 마련하여 일을 하게 하고,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장애인, 노령자 등)은 구빈세로 마련한 사회복지비용으로 돌보았다.
  • 교화소를 두어 노동의욕이 없는 자들을 강제노역으로 처벌하였다.

애민정책

엘리자베스 1세가 실시한 정치 방식의 핵심은 민중의 소리를 듣는 애민정치였다. 그녀는 1년에 두 번은 순시를 하면서 민중들의 여론을 들었는데, 이는 다른 유럽의 왕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횟수이다.


반(反)에스파냐 정책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프랑스에스파냐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도 뒤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적들을 지원하여 에스파냐를 견제하였다. 네덜란드독립 전쟁에서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그 결과 가톨릭을 국교로 한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금이 가게 되었고, 그 이래로 두 나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장로교를 믿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어린 아들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메리는 그 후 약 20년 동안 자신이 헨리 8세의 누나의 적손녀임을 내세워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여 잉글랜드의 왕위를 차지할 온갖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가 마침내 엘리자베스 1세 암살 계획이 모의된 배빙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1587년 2월에 메리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메리 스튜어트의 참수는 에스파냐에게 잉글랜드 침공에 대한 결정적 근거(명분)가 되어 주었다.1588년 5월 20일, 펠리페 2세무적함대 130척이 리스본을 출발하여 7월 19일에 잉글랜드해협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적함대는 잉글랜드 함대에 패하고, 스코틀랜드 방향으로 퇴각하다가 북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상당수가 파손, 침몰되었고 53척만이 스페인에 귀항하였다.

다음해인 1589년 엘리자베스 1세는 드레이크를 제독으로 하고 존 노리스 장군과 함께 잉글랜드 함대를 스페인으로 보냈다. 잉글랜드 군인 23,375명을 태운 150척 전함이 스페인 해군과 해전을 벌였으나 이번에는 잉글랜드 해군이 대패하였다. 잉글랜드는 약 15,000명에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40척의 선박이 침몰 또는 포획되었다. 이번 승리를 통하여 스페인의 해군력은 부활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잉글랜드는 외국과의 대결 속에서 국민들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이 생겨났으며, 이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를 국민 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였다. 당시 잉글랜드 민중들은 집안에 악기를 갖추어 문화활동을 즐길 정도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잉글랜드 문화는 꽃을 피웠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 독신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아시아에는 후에 일본동양척식주식회사가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식민지 경영기관인 동인도회사를 창설하여 그 세력을 세계로 뻗어나가 훗날 잉글랜드 왕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발판을 만들었다. 이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an era)’라고 부르게 된다.

말년

이처럼 화려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리 엘리자베스 1세가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인기를 받았지만, 그녀 역시 절대군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권력이 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손쉽고 빠른 수입을 올리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 예로 신흥 사업에 대해서 멋대로 독점권을 설치하여, 아첨하는 신하나 귀족 또는 상인에게 팔았다. 이런 그녀의 행동에 그동안 순수하게 복종하면서 협력하던 의회도 반대의 조짐을 보이더니 치세 말기에는 의회가 반(反)독점 논쟁의 도가니로 변했다. 또 엘리자베스 1세가 원했던 의회조종법언론 탄압이라는 이유로 의회가 반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는 1596년~1597년의 흉년과 무역 쇠퇴로 인해 지속적인 물가 폭등 및 실업자 대량 발생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국민들의 의욕도 땅에 떨어졌다.

더들리와 춤추는 엘리자베스 1세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여왕의 총신들은 대중의 증오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아일랜드를 정복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시도는 엘리자베스 1세의 마지막 총신인 에식스의 백작(Earl of Essex) 로버트 데버루(Robert Devereux)의 반란에서 절정에 이른다. 데버루는 아일랜드 총독의 자격으로 아일랜드의 반란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불리한 조약을 체결해야 되는 상황에 이르자, 갑자기 총독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여왕에게 직접 해명하겠다며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고 반란 진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의 관직을 박탈했다. 데버루는 이에 앙심을 품고 3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1601년런던에서 대중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런던에서 겪은 반란의 후유증은 심각하였다. 우울증과 지병이던 노인성 질환들이 심각하게 발생되면서 기력을 잃어가던 그녀는 1603년 3월 24일 7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신하들이 쉬어야 한다고 하자 엘리자베스는 “무엇을 해야 한다, 하는 것이 좋다는 왕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고, 얼마 뒤 죽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영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왕중 한명이다.

같이 보기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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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프리 골즈워디(Goldsworthy, J.D.): 《의회의 주권》(The Sovereignty of Parliament) Oxford UP 1999 ISBN 0-19-826893-9
  • 사라 그리스트우드(Gristwood, Sarah): 《엘리자베스와 레스터》(Elizabeth and Leicester) Bantam Books 2008 ISBN 978-0-553-81786-7
  • 존 가이(John Guy (historian)). 《내 심장은 나의 것이다: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삶》(My Heart is My Own: The Life of Mary Queen of Scots.) London and New York: Fourth Estate, 2004. ISBN 1-84115-752-X.
  • 크리스토퍼 헤이그(Haigh, Christopher).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Harlow (UK): Longman Pearson, (1988) 1998 edition. ISBN 0-582-43754-7.

외부 링크

전 대
메리 1세
영국의 군주
1558년 11월 17일 ~ 1603년 3월 24일
후 대
제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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