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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관련 결혼과 불륜 기록
가톨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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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조직 |
신학 |
전례 |
교황 관련 결혼과 불륜 기록(List of sexually active popes) 문서는 천주교회에서 혼인이 금지된 교황이 재위하기 전에 독신을 지키지 않고, 정식 결혼을 했거나 불륜, 성애 관계를 맺은 교황의 명단이다. 일부 사건은 교황 재위 전에 이뤄지기도 했으나 다른 일부는 교황 재위 중인 교황청 업무 중에도 결혼, 불륜, 성애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이런 행동들은 교황에게 금지된 행동이었고, 종교적 중죄였으나 교황직이나 사제의 자격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본 문서는 결혼, 약혼, 성애 관계를 구분하여 관련된 교황의 명단으로 작성하였다.
배경
오랜 기간 동안 성직자의 독신 서약은 기독교 보편교회 전통에서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로 여겼다. 현재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전통에서도 천주교회만 제외하고는 성직자(사제 및 목사)의 결혼을 금지하지 않는다.예수 그리스도는 결혼을 금지한 적이 없으며, 그의 제자인 사도 12명 중 대부분은 혼인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신약성경에는 베드로의 결혼과 그의 장모에 대한 기록이 있다.사도 바울은 결혼한 이후 독신으로 살았으나 그의 개인적인 선택이었고, 그 역시 결혼을 금지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는 기독교 성직자가 결혼해야 함을 명확히 밝히기까지 한다.
천주교회의 초대 교황으로 알려진 베드로 역시 결혼을 하였고, 초대교회의 대감독(대주교)도 결혼에 대한 제재를 받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성직자에게 결혼은 당연한 것이었고, 결혼한 성직자가 독신 성직자와 성직 책임에 구분되는 일도 없었다. 결혼 여부는 성직 과정에 어떤 영향도 없었다.
12세기, 단일 공동체였던 보편교회(공교회)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분열 하면서 서방교회는 ‘교황중심주의’를 신학과 교회의 핵심사안으로 채택하였다. 서유럽 지역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던 교황의 세습을 막기 위한 기본적 방안이 성직자의 ‘결혼 금지’, 즉 ‘독신주의’ 서약이었다. 서방교회의 독신 성직자 강조는 정치적 제도의 안전성을 위한 방안이었다.
성직에 어떤 영향도 없던 ‘결혼 여부’는 점차 강화되어 12세기, 1139년 서방교회의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완전히 바뀌었다. 이후 서방교회에서 성직을 받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독신 서약을 반드시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결혼이 아닌 약혼 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정부(情婦)를 두어 자녀를 낳기도 하고, 다른 성애 관계를 맺기도 했다.
혼인 관계의 교황
교황 | 재위기간 | 관계구분 | 자녀 | 관련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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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시몬 베드로) |
? | 결혼 생활 | 있음 |
신약성경에 장모의 기록, 예수 그리스도가 장모의 병을 고쳐줌, 아내와 함께 다녔으며 아내가 베드로와의 결혼생활을 기뻐했다고 함. 6세기 전승에 베드로에게 딸이 있었고, 그가 성인 ‘페트로닐라’라고 함. |
펠릭스 3세 | (483–492) | 결혼, 재위 전 사별 | 있음(2명) | 본인도 사제의 아들이었고, 재위 전에 2명의 자녀를 낳았음. |
호르미스다스 | (514–523) | 결혼, 재위 전 사별 | 있음(확인 1남) | 교황 실베리우스의 아버지임 . |
하드리아노 2세 | (867–872) | 재위 전 ‘스테파니아’와 결혼 | 있음(1녀) | 재위 중에도 아내와 라테란 궁에서 거주했음. 아내와 딸은 이동중 마차에서 동시에 암살당했음. |
요한 17세 | (1003) | 재위 전 결혼 | 있음(3남) | 아들 셋 모두 성직자였음. |
클레멘스 4세 | (1265–1268) | 재위 전 결혼 | 있음(2녀) | 둘 모두 수도자가 되어 생활함 |
호노리오 4세 | (1285–1287) | 결혼, 재위 전 사별 | 있음 (최소 2남) |
재위 이전 사생아 자녀를 둔 교황
교황 | 재위기간 | 관계구분 | 자녀 | 관련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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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2세 | (1458–1464) | 연인 | 있음(최소 2명) | 성직 전 2명의 자녀를 둠, 첫째는 스코틀랜드에서 낳아 영아기에 죽음, 둘째는 스트라부르크에서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낳았으나 영아기에 죽음. 독신 서약 문제 조사를 받아 성직 서품이 늦어졌음. |
인노첸시오 8세 | (1484–1492) | 연인 | 있음(1남1녀) | 성직 전에 자녀를 둠 당시 교황 친족 중심의 족벌정책이 비난 받았지만, 아들 ‘프란체시에토 치보’는 메디치 가문 딸과 결혼하여 교황 레오 10세와 처남 관계였고, 딸 ‘테오도리나’는 유명가문과 혼인했음 |
클레멘스 7세 | (1523–1534) | 여종과 불륜 관계 | 있음(1명) | 아들은 플로렌스 공작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임 |
재위 중 사생아 자녀를 둔 교황
이성애 관계
교황 | 재위기간 | 관계구분 | 자녀 | 관련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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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3세 | (1534–1549) | 실비아 루피니와 연인 | 있음(3남1녀) | 남녀 관계를 즐기기 위해 성직 서품을 미루었고, 추기경 보좌 일을 맡은 이후에도 ‘실비아’와 사이에서 사생아 4명을 낳음. 1513년에 관계 정리됨. 그의 사생아 아들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를 ‘파르마 공작’이 되게 함. |
그레고리오 13세 | (1572–1585) | 마달레나 풀치니와 밀회 | 있음(확인 1남) | 1539년 볼로냐의 주교 직 수행중 마달레나와 밀회로 1548년 아들 ‘지아코모 본콤파니’를 낳음. 사생아 아들을 ‘세인트 안젤로 성채’의 총독과 ‘페르모’의 총독인 ‘교회의 장관’으로 삼았음. |
레오 12세 | (1823–1829) | 간통 | 있음(최소 3명) | 추기경으로서 스위스 근위병 군인의 아내와 간통하였고, 독일 교황 대사로 근무 시 사생아 3명을 낳은 기록이 있음. |
양성애 관계
교황 | 재위기간 | 관계구분 | 자녀 | 관련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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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2세 | (1503–1513) | 밀회 남색 |
있음(3녀) | 3명의 사생아 딸을 둠. 그 중 한 명이 ‘펠리체 델라 로베레’로 재위 20년 전인, 로잔느 주교 시절인 1483년에 태어남. 피사 공의회에서 1511년 그의 퇴임 요구 사유가 남색 혐의였음. |
재위 중 밀회 관련 사건이 있는 교황
이성애 관계
교황 | 재위기간 | 관계구분 | 자녀 | 관련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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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오 3세 | (904–911) | 밀회 | 있음(최소 1명) | 교황 요한 11세의 아버지로 주장됨.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의 문서에도 기록됨 교황연대표에도 기록되었으며, 내연녀와 창부정치를 이끌었음. ‘플로도마르드’의 연대기에 따르면 요한 11세의 형이 스폴레토의 영주였음. 요한 11세 역시 많은 아들이 있었음. |
요한 10세 | (914–928) | ’테오도라’와 ‘마로지아’와 밀회 | 없음 | 테오도라와 밀회를 가졌고, 테오도라의 딸인 마로지아와도 밀회 관계였음.암흑시대 문서를 참조바람. |
요한 12세 | (955–963) | 간통 근친상간 |
없음 | 간통과 근친상간 기록이 있으며. ’소라크테의 베네딕투스’의 기록에는 여성 무리와 간통했다고 기록함. 교황연대표에 따르면, ”그들은 요한 12세의 간통을 알아차렸고, 그 확실함에 눈을 의심했다. 그는 라이니어의 과부와, 친아버지의 첩과, 과부 안나와, 친조카와 간통하였다. 그는 거룩한 곳을 창부의 소굴로 만들었다.” 다른 기록에는 요한 12세는 온갖 죄악을 저지른 기독교인 ‘칼리굴라’로 묘사함. 사망에 대해서 일부 자료에서는 간통 행위 중 마비가 온 후 8일만에 사망하였다고 함. 다른 자료에서는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 살해했다고도 함. |
알렉산데르 6세 | (1492–1503) | ’바노차 데이 카타네이’와 ‘굴리아 파르네세’와 밀회 | 있음(최소 7명, 최대 10명) |
서품 후에도 ‘바논자 데이 카타네이’와 지속적 밀회 관계였고, 재위 기간에는 정리했다 주장함. ‘바논자’와 사이에 사생아 ‘체사레 보르지아’(추기경), ‘지오반니 보르지아’(칸디아 공작), ‘지오프레 보르지아’, ‘루크레지아 보르지아’를 낳았음. 재위 중 교황 바오로 3세의 누이인 ‘굴리아 파르네세’와 내연관계로 60대 나이에 2명의 사생아 딸을 두었음. 알렉산데르 6세는 최소 7명, 최대 10명의 사생아 자녀가 있었음. 사생아 아들 ‘지오반니’를 ‘교회의 장군’으로 임명, ‘칸디아 공작’이 되게 했고, 다른 아들 ‘체사레’는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영지를 수여함. |
동성애 관계
교황 | 재위기간 | 관계구분 | 자녀 | 관련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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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세 | (1464–1471) | 남종과 밀회 | 없음 | 멜론을 잘못 먹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남종과 남색 관계를 맺는 중 사망한 것으로 기록됨. |
식스토 4세 | (1471–1484) | 공개적 남색 | 없음 | 기록에 따르면, 식스토 4세는 ‘남자와 남색을 사랑하는 자’였고, 주교 시절에도 성애에 관심이 높았고, 추기경 시기에도 유명하였다고 전함. |
레오 10세 | (1513–1521) | 밀회 | 없음 | 사망 후 남색 확인, ‘마르칸노니오 플라미니오’에 대한 처우의 저의가 밝혀짐. |
율리오 3세 | (1550–1555) | ‘이노첸조 치오치 델 몬테’와 밀회 | 없음 | 공공연한 스캔들로 알려진 ‘이노첸조’와의 오랜 밀회가 있었음. 당시 그를 방문한 베네치아 대사는 "이노첸조가 교황과 침대를 나누었다"고 기록함. |
양성애 관계
교황 | 재위기간 | 관계구분 | 자녀 | 관련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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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9세 | (1032–1044, 1045 사임 및 재임, 1047–1048). | 간통 남색 결혼 |
없음 | '수많은 난잡한 간통'을 일으킨 인물로 기록.교황 빅토르 3세는 저서에서 “그(베네딕토 9세)는 강간을 하고... 말로 형용 못할 짓들을 하였다.”고 기록함. 교회박사인 ’페트루스 다미아누스’의 연대기록에서 베네딕토9세의 인생이 불륜적 성애로 가득 했고, 남색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미아누스는 베네딕토 9세를 남색과 수간, 주지육림으로 고발하였음. 1045년 베네딕토 9세는 결혼하기 위해 사임하였음. |
같이 보기
참조
- The Bad Popes, Chamberlin, E.R., Sutton History Classics, 1969 / Dorset; New Ed edition 2003.
- The Pope Encyclopedia: An A to Z of the Holy See, Matthew Bunson, Crown Trade Paperbacks, New York, 1995.
- The Papacy, Bernhard Schimmelpfennig,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84.
- Lives of the Popes, Richard P. McBrien, Harper Collins, San Francisco, 1997.
- Papal Genealogy, George L. Williams, McFarland& Co., Jefferson, North Carolina, 1998.
- Sex Lives of the Popes, Nigel Cawthorne, Prion, London, 1996.
- Popes and Anti-Popes, John Wilcock, Xlibris Corporation, 2005.
- La véritable histoire des papes, Jean Mathieu-Rosay, Grancher, Paris, 1991